순간랩 이야기

 1995년의 그때의 나는,

어렸을 때 지독하게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다섯 가족,
치열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길이 꺼져도 남겨진 탄자국처럼 어쩔 수 없이 생긴 상처는
그렇게 쉽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힘겹게 지켜온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는
1995년 빚을 독촉하는 새빨간 딱지가 온 집 안을 도배하던 그 날,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이후 스무 번이 넘는 이사를 하면서 우리 가족은 가난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비가 많이 와서 지하실 샛방에 물이 넘쳐 가구가 다 젖은 적도 있었습니다.
곰팡이 냄새 가득한 우리집 한편에서 엄마는 바닥을 걸레로 훔치며
저희 몰래 참 많이 우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 이후로 한번도 집에 오질 않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티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세 살의 저는 엄마 옆에서 잠이 들었다가
큰누나가 불현듯 외친 한마디에 깨어버립니다.

‘아빠가 우리 버린 거 맞아? 아빠 바람폈다며!’
“조용히 해. 애 깬다.”

엄마를 등지고 누워있었던 저는 누나의 말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멈춰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침대 끝에 얼음처럼 누워있는 채로 밤새도록 벌벌 떨던
그날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겠군요.

2008년의 그때의 나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저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갈 형편이 되지 못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시험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시고, 뒤늦게 대학이라는 곳을 갔습니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은 제가 생각한 것과 참 많이 달랐습니다.
성적과 입시를 향해 달리던 과거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정답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정신을 차리고 가야할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저는 학교를 다니며 동시에 작은 사업을 시작합니다.
2009년 부터 입시학원을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교육의 사명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뜻이 깊어사도 아니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던 영어과외가
한, 두 명 입소문이 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25살 어린 청년에게는 꽤 큰 금액을 손에 만질 수 있었습니다.
늘 가난하기만 했던 제 삶에서 저는 정말 생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학원이 보습 학원이 되었고,
입시 학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9년간 참 많은 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 학생들을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도 매일매일 하루를 정말 버티며 살아가는구나…’
‘대학을 가도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가겠구나…’
‘교육이라는 것이 아이를 살리는게 아니라, 죽여만 가는구나…’

하지만 저는 금방 그 사실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입시 교육에 맞게 더 철저하고 강하게 지도합니다.
마음은 따뜻하게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시험의 잣대 앞에서 저는 아이들을 내몰기만 하던 못난 어른이었습니다.
그때의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뿐이었기 때문입니다.

2013년의 그때의 나는,

입시학원이 나름의 성과를 보이던 어느 날, 

학원을 졸업한 선배들을 모아 작은 파티를 열었습니다.
s대 1명, y대 2명 등…걸출한 성과를 내던 때였지요.
저는 우리 학원을 졸업한 제자들을 만나
후배들에게 학교를 자랑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후배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원장 선생님이 좀 원망스러워요.
그때 저에게 한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대학을 왔지만, 저는 어디로 가는지 또 가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 과에 왜 왔는지. 심지어 이 학교에 왜 왔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저는 아마 몇 년 안에 자퇴를 할 것 같습니다.
후배 친구들도 어른들의 이야기만 믿고,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마세요.”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저의 뒷목을 얼얼하게 만드네요.
저는 그 날의 사건으로 제가 가진 모든 교육관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브루타, 플립 러닝, 참여교육, 자기주도학습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육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2014년 그때의 나는,

저는 그 답을 쫒기 위해서 참 여러 곳에서 배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한 번은 수백만 원짜리 세미나를 찾아가, 교육법을 배우려 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너무나도 수준 낮은 강의에 실망한 적도 있었어요.
그렇게 아스바닥에만 수천만 원의 기름 값을 지불하면서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교육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습니다.
배운 것이 많아질수록 내면에 점점 허한 느낌이 생기더군요.
다양한 방법을 적용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뭔가 부족하고 이상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부터가 내면을 다듬는 방법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잘 하는 것, 내가 무엇을 그려나가는 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무슨 선생질을 하는 것인가? 라고 말이지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교육을 듣고 목표만 채우려 하니
효과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교육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말이에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나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요.
애써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것도 이때쯤인 걸로 기억이 됩니다. 

2015년의 어느 날, 인문학의 눈을 뜨다.

인문학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저는 내면의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되었어요.
닥치는 대로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으며,철학과 역사, 종교, 심리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피노자, 니체, 아들러, 아우구스티누스, 카잔차키스, 톨스토이, 함석헌, 칸트 등등
남들이 유명하다는 지성인의 책은 한 권도 놓치지 않고 읽으려고 했습니다.
매일 책을 읽으면서 저는 세상의 다양한 관점을 습득하게 됩니다.
머리의 지식과 양분이 쌓이니 이런 것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커졌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1년 동안 독서토론 모임을 개최합니다.
그 일은 한 번 더 제가 가진 한계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책만 읽는 것만으로는 이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된것이지요.
우리는 모여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마음껏 세상의 관점을 이야기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우리 일상의 삶은 단 하나도 바뀌는 게 없었습니다.
15년도의 나는 정말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나는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자유리라는 이름이 생긴것도 이때 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현실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매달 직원들의 급여로 수천만 원이 나가야했고, 학부모로부터 수시로 전화가 밀려왔습니다.
학생들을 관리하고, 원하지 않는 교육을 하면서 살아가는 제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아름다운 이상과 비천한 일상속에서 무언의 한계를 느끼게 된 그 때,
저는 다시 일상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2016년의 그 때. 스승을 만나면서 깨닫다.

건강한 스승들을 만나면서 한 가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갔습니다.
모든 진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내가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 한 번 제대로 개고 살지 않은,

무너져있는 저의 일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육이 있어야 할 곳은 머나먼 이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일상이라는 것까지 알게 됩니다.
100일 동안 3km를 매일 달리면서, 저는 부모님이 미처 가르쳐주지 못 하셨던,

인생에서 혼자 서는 방법을 그렇게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한 가지를 꾸준히 실천하고, 반복적으로 진행했을 때 인생에서 어떤 변화가 오는 지 
몸으로 체험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해야하는지 깨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생각만큼이나

실제로 도전하고 경험하는 것이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아갔습니다.

타인이 내게 해주는 백 마디 말보다

말 끝 속에 담겨져 있는 그들의 행동이 더 진실된다는 사실도,
내가 행하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

결국은 타인에게 상처만 준다는 것도 이때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하고 있는 현재의 일에 대해서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나는 어떤 삶을 그리고 있는지, 나는 자유로운지,

나는 타인이 아닌 나의 욕망대로 살고 있는 지.

그 어느 때보다 입시 학원의 원장이라는 자리가 뼈아프게 느껴지던 시절이 이때였습니다.
학원을 나가기 싫어 근처의 커피숍으로 도망가기도 했었습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를 더 깊게 찾고 싶었습니다.

2017년의 그 때,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가다.

조금씩 내면의 공부로 나를 다지며 책, 스승, 경험이라는
세 박자의 밸런스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저는 더 노련하게 스스로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내 안의 감정이라는 녀석이
내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일탈을 좋아하는 평소의 내가,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행동하길 좋아하던 나의 삶의 패턴이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진 거울조각 맞추듯 알아가면서
결국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처음의 나부터 의심하며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는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1983년부터 2007년까지,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잊고 살아야만 했던 한 가지 한 가지의 아픔을 깊게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내면의 어린 아이가 1995년 아버지가 나를 버리던 그 날 이후
성장을 멈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으로 내게 상처를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용서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업자의 변절 속에서 오는 아픔 또한
나를 버리고 가는 그에 대한 원망이었고,
힘들게만 살아온 어머니를 지키면서 동시에 밀려오는 불편함도
나의 아이로부터 시작됨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내면에 꺼내기 어려운 아픈 상처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내면의 아이를 외면했던 나는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깊게 영향을 주어
반복되어 돌아가는 내 삶의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나아가기 위해서 내면의 어린아이를 꼭 치유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죠.

저는 감정을 치유하기 위한 과정으로 다양한 곳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상한 종교 활동을 하는 곳, 기부 연구소,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심리상담센터,
감정 연구소, 사찰, 인문학 교육장소, 플레이백시어터, 연극 치료 등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감정에 대해서 공부하고 체득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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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그 때, 바나나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핵심감정을 치유하고 나서 저는 감정을 치유하니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면의 어린아이가 건강해지고 나니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긍정의 에너지로 변환되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가슴 깊이 밀려오는 나의 순수한 욕망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심이 잡힌 저는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예전과는 다르게 기준이 잡혀있습니다. 

저는 5년이라는 오랜 시간 끝에 ‘자유로움’이라는 것은 감정의 주인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때부터 감정과 진짜 자기계발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육이 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다가
10년 동안 운영하던 입시 학원을 폐업하고, 새로운 길을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치유된 과정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설프기만 하던 프로젝트 교육에 한 명 한 명의 좋은 에너지들이 모였고,
제 인생을 걸어서 만든 프로젝트에 스스럼 없이 가면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친구들 덕분에 저는 2018년 10여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 한 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저는 오히려 참여하는 분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고,
감정의 치유와 자유의 갈망이라는 공통된 울타리 속에서
가족보다 더 깊은 인연들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방향의 교육을 진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진심을 가진 마음 하나로 도전을 하니,
소중한 인연들의 도움으로 순간랩이라는 작은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19년 그 때, 콘텐츠 연금술사단이 시작되다.

자유롭게 내 욕망대로 산다는 전제 조건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됩니다.
감정이 치유된 나의 친구들이 더 탁월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정을 이어가다
2017년 저는 아주 훌륭한 스승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소속없이 살아가던 자유로운 자유리이지만
저는 본능적으로 이 분과 깊은 연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사업가를 만나 그들의 자유로움을 지켜주던 스승님의 목표는 단 한 가지,
대한민국에 맞벌이 부부가 없어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모든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고,
자신의 자녀와 육아에 온전히 신경을 쓸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스승님도 가정에서 맞벌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던 아내 분도 퇴사를 하고
부부 모두 집에서 일하면서 육아를 충분히 합니다.
일보다 육아가 먼저인 삶을 사십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수익은 예전보다 10배 이상입니다.
그 비밀의 한 가운데에는 무제한 복제가 가능한 콘텐츠라는 핵심 비결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을 만나서 콘텐츠라는 것에 눈을 떴습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나의 욕망을 표출하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통해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콘텐츠의 비법을
저는 ‘신’을 통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것을 크리에이터 비법서라는 글로 기고하였고
오랜 설득 끝에(혹시나 뜻이 잘못 전달될까 걱정하던 마음을)
콘텐츠의 전 과정을 교육으로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마음과 스승의 생각에 동감해주기 시작하셨고,
그렇게 콘텐츠 연금술사를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세상에 따뜻하게 자신의 욕망을 그려나가는
멋진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건강을 만드는, 글씨를 만드는, 낙서를 그리는, 목소리를 다듬는
다양한 크리에이터들을 만나면서 콘텐츠로 세상을 그려나가는 연금술사단을 알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저는 순간랩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오늘도 이곳이 사라지는 그 날을 목표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를 만든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곳에서
우리가 바라는 부분의 문제가 해결되어감을 의미하듯이,
사업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일상의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문화는 내면의 어린아이가 건강하게 자란 어른들이 만든 세상입니다.
유년시절의 아픔이 만들어내는 가짜감정이 없는
건강한 어른들이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 오기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라는 명분으로 나를 구속하던 타인의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나의 욕망으로 세상을 그려가는 어른들이 당연한 세상이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이상을 쫒느라 일상이 엉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바로 서서 이상이 쫒아오는 건강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중심 잡힌 사람들이 만들어낸 건강한 콘텐츠로
은퇴가 빨라지는 사람들이 당연해지는 건강한 그 날을 기다립니다.

순간랩이 없어지는 그 날,
조르바처럼 다 같이 춤추며 자유를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상적인 꿈을 쫒아가는 제 인생의 답이 유일함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후세의 누군가에게 선택사항이 늘어날 수 있는 그런 문화를 그려봅니다.

더 깊게 저의 일상을 공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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